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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성직자의 정치 참여 어떻게 볼 것인가?(1)
  • 편집국
  • 등록 2021-12-22 16:5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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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흥선 목사(총신대학교 아카데미 실천목회 주임교수, 기독교미디어재단 이사장)

 이흥선 목사(총신대학교 아카데미 실천목회 주임교수, 기독교개혁연대 상임대표)

 

 목회자의 정치 참여에 대하여 과연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상고할 필요가 있다. 본고는 일반 성도들보다 특히 목회자들에게 초점을 맞춰 쓰여 진 글임을 참고 바란다. 그렇지만 일반 성도들에게도 꼭 알아야 할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집단 양극화현상(集團 兩極化現像)은 사회뿐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요즈음 정치적 문제로 인한 교회 내 갈등은 매우 심화되고 있다. 이런 양극화는 성도와 성도, 목회자와 목회자간 반목과 분열의 단초가 되고 있다. 여기에 망국적인 포퓰리즘(Populism, 대중 인기 영합주의)까지 가세되어 공교회의 거룩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정치로 인한 반목과 갈등은 교회 내에서도 진보적 성향을 띤 젊은 세대들과 보수적 성향을 띤 연세가 있는 성도들 간에도 대립되고 있다. 또 목회자들 세계 속에서도 진보적 성향을 띤 목회자와 보수적 성향을 띤 목회자들 간 대립하면서 반목이 커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기독교 내에서도 지연(地緣)적 이유 또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한국교회를 양극화의 수렁에 빠뜨리고 있는 것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구약에서의 선지자와 왕

 

 성도들 개개인의 정치 참여는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얼마든지 정치 참여가 가능하고 자기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정치적 견해를 갖거나 표현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비폭력적 방식으로만 용인이 된다. 이같은 표출의 통로로 자유민주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선거라는 방식을 통하여 자신의 권리를 얼마든지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만 정치 참여가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태도를 견지하면서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데모 성격의 집회가 아닌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출할 수 있는 장치가 바로 선거제도이다. 표를 통해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을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 행보에 극단적 행보를 표출하는 일부 목회자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왕에게 바른 말을 직고하거나 죄를 지적하였음을 근거로 삼는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구약은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고 죄를 짓고 타락할 때 하나님이 세운 종(선지자)을 왕에게 보내 경고하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안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아야 한다. 

 일예로 구약성경에서 나단 선지자가 살인죄와 간음죄를 지은 다윗 왕을 찾아가 죄를 지적한 일이 있었다(삼하12:1-14).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고 회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단 선지자는 왕에게 폭언을 한다든지 왕의 따귀를 때린다든지 등등의 물리력을 일체 가하지 아니하였다. 선지자는 자신의 입에 넣어준 하나님의 예언을 그대로 가감 없이 전했을 뿐이었다. 나머지 왕에 대한 처리는 하나님의 몫이다. 이것이 왕을 대하는 구약에서 종(선지자)의 방식이요 태도였다.

 

 하지만 신약시대는 세상 왕들(세속 정권)이 사탄의 권세 안에 있는 자들(엡2:8)이기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교훈이나 경고를 주기 위해 자기의 종들을 보내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약에서의 목회자와 왕(권세자)

 

 구약의 방식과 신약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전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신약시대에는 세상 왕들(대통령, 지배자)에게 선지자(목자=목사)를 보내지 않으신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예언을 받은 것만 전해 주었다. 하나님이 주신 예언에 자기의 생각을 더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약시대는 왕(대통령)에 대한 그런 예언을 주의 종들에게 주시기 않는다.

 

 그렇다면 왕(권세자, 대통령 등)이 잘못할 때 목회자나 성도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물어본다면 예수님은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씀하실 것임이 분명하다. 구약은 율법아래에 있기 때문에 용서를 수용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무한정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마6:14,15; 18:21 막11:25 눅6:37; 11:4 고후2:10 엡4:32).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마5:43,44). 최고의 적은 원수(사람)이다. 성경에서는 이 원수를 내 힘으로 갚으려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원수를 직접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면 하나님이 친히 갚으신다고 말씀하셨다(롬12:19 히10:30). 그러면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오히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롬12:20)”고 말씀하셨다.

 

 사도바울은 롬 12장과 15장까지 성도의 신앙생활, 사회생활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면상 간략하게 설명 드린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1,2).

 

 성도는 권세 잡은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셨다. ‘각 사람은’이란 단어와 ‘복종하라’는 말은 누구든 예외가 없다는 말이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설령, 불신자인 왕(대통령)도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 사상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왕권신수설은 성경적이 아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은 비단 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가 기관에 다양한 형태의 위 권세들을 포함한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제도와 왕(권세자, 대통령 등)을 존대하라고 말씀하셨다(벧전2:13-17).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적으로 다스리시는 동시에 세속 정부인 국가를 통해서도 우리를 통치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다. 세상 정권도 하나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서 합당할 뿐 아니라 세상 집권자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므로 그들을 배척하면 사실상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삼상8:7).

 집권자들의 형태가 다양하다 할지라도 권세는 한결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롬13:1), 심지어 일인 독재로 군림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권세임을 알아야 한다(잠8:15; 24:21 벧전2:17). 통치자도 하나님의 일꾼이다(롬13:4,6).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주께서 세우신 자들에게(롬13:4) 공손히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다(롬13:2,5,7). 권세자의 사적인 불법까지 수용하라는 말은 아니다. 범법을 일삼는 권세자는 법 규정 안에서 법으로 처벌될 수 있으며, 국민도 법 안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인간은 누구이든 간에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고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에 내는 조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롬13:6.7). 악을 행하는 자가 통치자를 두려워하지만 선을 행하는 자는 통치자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칭찬을 받는다(롬13:3)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집권자, 즉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대리로서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하며, 모든 정성과 열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와 선과 후의와 공의를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대리’로 봉사한다는 각성 하에, 과오를 범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섬기지 않고 오만하여 악한 권세자로 행세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롬12:19 히10:30).

 

 권세자를 위한 성도의 태도

 

 그렇다면 왕(권세자, 대통령 등)이 악한 행동을 할 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도에게는 최고의 특권이요 무기가 있다. 이것이 기도이다. 오직 권세의 근본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만이 성도에게 주어졌다. 직접적인 물리력 행사는 허락되지 않는다(위에서 언급한 성경 구절들을 참고하기 바람). 내가 하나님 위치에 서서 하나님 되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

 권세자들이 악한 자가 되어 백성들을 괴롭히고 악행을 저지를 때 성도는 기도만 하면 된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그 성도의 기도가 합당하면 응답하셔서 악한 권세자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 손에 물리력을 갖고 투쟁하는 것은 절대 성경적이 아니다. 기도는 의식적 형식이 아니다. 실제이다.

 

 왜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손의 물리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 하는가? 이는 살아계신 권능의 삼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다. 내가 기도해도 하나님은 응답하실 수 없는 무능력한 분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 물리력으로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믿음 없음이다. 이것을 형식적 믿음, 형식적 기도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선포해야 할 주의 종들이 믿음 없음을 보여주는 행동이다.

 

 성도의 싸움은 혈과 육(사람을 상대한 물리력)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세력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하늘(공중권세)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영적 싸움임(엡 6:2)을 명심해야 한다.

 

  일부 극렬 목회자들로 인해 전도 장애 요인

 

 마귀 대적은 항상 해야 한다. 정부에서 교회에 불리하게 할 때만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마귀와는 영적으로 항상 싸워야 한다. 어느 기간에 더 많이 하고 덜 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는 항상 싸움을 해야 하고 육적으로는 수용해야 한다. 물리력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영적으로 교회가 세워지기를 항상 기도하면서 자기를 관리해 가는 것이 마귀를 이기는 것이다. 어떤 제도나 억압에도 실망하거나 시험 들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성령으로 충만함으로 자신을 굳건히 세워가는 것이 마귀를 이기는 길이다. 물리력인 몸으로 싸우는 것이 절대 아니다. 악한 영들은 총칼로 이겨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타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합리화 한다. 현 정권이 좌파이기 때문에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교회를 지킬 수 있다고 항변한다. 공산주의를 왜 싫어하는가? 독재를 하기 때문 아닌가? 자칭 보수 세력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현 정권을 보수 세력이 되찾아서 10,20년 계속해서 정권 유지를 소망할 할 것이다. 이 생각 자체가 독재적 공산주의다. 공산독재란 한 사람 또는 한 정치세력이 계속하여 정권을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바람직한 정치란 여당 야당이 한두 번씩 번갈아 가면서 집권할 때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그나마 바람직한 정치가 된다.

 

 한 국가가 공산화 되거나 주변의 대국을 통하여 식민통치를 받게 되는 것도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날 때 애굽이나 바벨론 등 주변 대국의 노예가 되어 종살이 하였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이요 징계였다.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국가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국가의 흥망성쇠,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의 투쟁 방식에 그리스도인들이 동참해서는 안 된다. 특히 목회자들 중 일부의 투쟁적 일탈 행동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가로막는 사탄 적 행동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 정권을 극렬하게 비판하고 투쟁하는 일탈된 목회자들로 의해 한국 교회와 성직자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었고, 전도에 엄청난 장애요인가 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2:1-3).

 

 보수 세력이든, 진보 세력이든 간에 이들이 주관하는 집회 현장을 보게 되면 폭력적 언행들이 횡행한다. 한 예로 소위 보수 집회에서의 일부 앞장 선 목사들의 발언 수준들을 보면 저급한 속어들이 난무한다. 대통령을 향한 육두문자는 시장 잡배들을 연상케 한다. 이런 속어들은 정권 대상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신학사상이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불특정 목회자들을 향해서도 설교에서 ‘×자식들’이라는 육두문자까지 서슴치 않는다. 한마디로 성직자라고 말할 수 없다. 돈과 명예 등 탐욕으로 가득 찬 거짓선지자 같은 행동들을 자랑스럽게 토해내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성직자의 입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들이다. 한마디로 부끄럽다. 성직자의 한 사람으로 대신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에 사과드린다.

 이들의 생각과 사상 속에는 도대체 성령의 역사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성령님은 그렇게 저급한 수준으로 역사하시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성령의 역사라고 거짓으로 위장한다. 신앙의 양심마저 의심케 한다.

 이런 집회나 유튜브에서의 발언에서 성령의 역사는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악령의 역사만 가득하다. 이들 발언에서 예수님의 사랑 언어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상대에 대한 인격적 배려나 겸손은 아예 상실되었다. 오히려 상대에 대한 비난, 비판, 미움, 이간, 판단, 정죄, 혈기, 분쟁, 원수 맺음, 당 지음, 분열, 싸움의 영들만 가득한 현장이고 발언일 뿐이다.

 

 이같은 일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악한 불신자들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한다(갈5:19-21). 이런 집회나 유튜브에서 이들의 발언들을 보거나 들을수록 성령의 역사는 소멸되고, 위에서 열거한 악한 영들만 충만히 받게 된다는 사실을 꼭 명심했으면 좋겠다. 다음의 성경구절로 본 글을 맺는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4:6).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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